사가라 도미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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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가라 도미모치는 1750년 미노국 나에기번에서 태어나, 히토요시 번의 번주를 역임한 인물이다. 1767년 사가라 요리사다의 양자로서 번주가 되었으며, 재정 개혁, 군사력 강화, 교육 개혁 등을 추진했으나, 보수 세력의 반발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는 1889년과 1898년에 번정을 담당했으며, 1769년 2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메이지 시대 초 사가현에서 발생한 메라야마 소동은 그의 통치 시기의 사회 불안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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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라 도미모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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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족 | 나에기 토오야마씨 → 사가라씨 |
이름 | 사가라 도미모치 |
원어 이름 | 相良 福将 |
개명 | 겐지로 (아명), 토오야마 토모미츠, 사가라 토미모치 |
시대 | 에도 시대 중기 |
출생 | 간엔 3년 6월 13일 (1750년 7월 16일) |
사망 | 메이와 6년 1월 12일 (1769년 2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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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 | |
관위 | 종5위하 에치젠노카미 |
주군 | 도쿠가와 이에하루 |
막부 | 에도 막부 |
번 | 히고국 히토요시번 번주 |
가족 관계 | |
아버지 | 토오야마 토모아키라 |
양아버지 | 사가라 요리사다 |
아내 | 마에다씨 |
자녀 | 양자 나가히로 |
형제 | 토오야마 토모유키, 도미모치 |
기타 정보 | |
묘소 | 구마모토현 히토요시시 간조지 |
계명 | 태운원전 현악도수 |
2. 생애
1750년 미노국 나에기번주 도야마 도모아키의 차남으로 태어나 처음에는 '''도모미쓰'''(友充)라는 이름을 가졌다. 1767년 제9대 히토요시번주 사가라 요리토미가 사망하자, 당시 로주였던 마쓰다이라 타케모토의 추천을 받아 그의 말기양자로 입적되었다.[1][2] 이후 사가라 도미모치(相良 福将)로 개명하고 가문을 계승하였는데, 이름의 '도미'(福) 자는 제4대 번주 사가라 요리후쿠에게서 받은 것이다(헨키). 같은 해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를 알현하고 종5위하 에치젠노카미에 서임되었다.
번주가 된 해에 메라야마 소동이 일어났고, 재임 중 홍수와 한발 등 자연재해가 잇따라 번 재정이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학문 장려에 힘써 훗날 번교 창설의 기초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1769년 향년 2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여, 영지인 히토요시번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그의 뒤는 양자인 사가라 나가히로가 이었다.
2. 1. 출생과 가계
간엔 3년(1750년) 6월 13일, 미노국 나에기번의 번주 도야마 도모아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도모미쓰'''(友充)였다.메이와 4년(1767년) 3월 5일, 히토요시번의 제9대 번주 사가라 요리토미가 사망하였다. 처음에 사가라 가문의 중신들은 막부에 사가라 나가마사의 정실인 수창원의 조카이자, 사가라 미쓰나가(공식적으로는 요리토미와 동일 인물로 취급됨)의 사촌에 해당하는 하타모토 아키즈키 타네타케의 동생 타네쿠사[1]를 양자로 맞이하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로주였던 마쓰다이라 타케모토는 타네쿠사가 나이가 많고 성씨가 다르다는 점을 들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2] 대신 타케모토는 히토요시 번주 가문의 다른 인척이나, 혹은 자신의 친동생인 도야마 도모아키의 차남 도모미쓰 중에서 양자를 선택할 것을 제안했다. 사가라 가문의 인척 중에는 마땅한 인물이 없었기에, 중신들은 도모미쓰를 말기양자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도야마 도모미쓰는 사가라 도미모치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름의 '도미'(福) 자는 제4대 번주 사가라 요리후쿠의 이름에서 따온 것(헨키)이다. 그는 사가라 요리토미의 말기양자로서 가문을 이어받았다. 같은 해 4월 15일에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를 알현하였고, 12월 16일에는 종5위하 에치젠노카미 관직에 임명되었다.
2. 2. 번주 계승
메이와 4년(1767년) 3월 5일, 제9대 번주 사가라 요리사다가 사망하였다. 사가라 가문의 중신들은 당초 사가라 나가아리의 정실인 슈쇼인의 조카이자, 사가라 미츠나가(공식적으로는 요리사다와 동일 인물로 취급)의 사촌에 해당하는 하타모토 요리아이세키 아키즈키 타네타케의 동생 타네요시[1]를 양자로 맞이하려 하였다.그러나 당시 로주였던 마쓰다이라 타케치카는 타네요시의 나이가 많고 사가라 가문과 성씨가 다르다는 점을 들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2] 대신 타케치카는 히토요시번 번주 가문의 다른 인척이거나, 혹은 자신의 친동생인 미노 나에키번 번주 토오야마 토모아키라의 차남 토모미츠(友充) 중에서 양자를 선택하도록 제안하였다. 사가라 가문의 인척 중에는 마땅한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중신들은 결국 토모미츠를 말기 양자(末期養子)로 맞이하는 안에 동의하였다.
이에 따라 토모미츠는 이름을 사가라 도미모치(相良 福将)로 바꾸고, 사가라 요리사다의 사후 양자로서 가문을 계승하였다. 이름의 '토미(福)' 자는 제4대 번주 사가라 요리토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편휘). 같은 해 4월 15일에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를 알현하였고, 12월 16일에는 종5위하 에치젠노카미에 서임되었다.
2. 3. 번정 활동
사가라 도미모치는 메이와 4년(1767년)에 히토요시번의 번주가 되었으나, 재임 기간은 메이와 6년(1769년)까지 약 2년에 불과했고, 젊은 나이에 사망하여 영지에 직접 가본 적도 없었다. 그의 짧은 재임 기간 동안 번은 메라야마 소동과 같은 내부 혼란을 겪었으며, 연이은 홍수와 한발로 인해 재정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어 번의 수입이 2만 석에서 1만 4천 석 정도로 크게 감소하기도 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학문에는 열의를 보여, 훗날 번교가 창설되는 기초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2. 3. 1. 메라야마 소동
메이와 4년(1767년) 1월, 메라야마 소동이 일어나 182명이 처벌받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시기 히토요시번은 홍수와 가뭄이 잇따르면서 번의 수입이 2만 석에서 1만 4천 석 정도로 급감하는 등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으며, 메라야마 소동은 이러한 불안정한 사회 상황을 반영하는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사가라 도미모치가 번주로 취임한 해에 발생한 사건이지만, 그가 영지에 직접 부임하기 전에 일어났고 곧 사망하여 소동 처리에 직접 관여하지는 못했다.2. 3. 2. 재정 악화
메이와 4년(1767년) 1월에 메라야마 소동이 일어나 182명이 처벌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번정에서는 홍수와 한발이 잇따라, 2만 석의 수입이 1만 4천 석 정도로 격감했다고 한다. 다만 학문에는 열심이었고, 후에 번교가 창설되는 기초를 다졌다.2. 3. 3. 학문 장려
메이와 4년(1767년) 1월, 메라야마 소동이 일어나 182명이 처벌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도미모치가 번주가 된 이후에도 번정은 순탄치 않아 홍수와 가뭄이 잇따랐고, 이로 인해 2만 석에 달하던 수입이 1만 4천 석 정도로 크게 줄어들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도미모치는 학문에 열의를 보이며 이를 장려하는 데 힘썼다. 그의 노력은 훗날 번교가 창설되는 기초를 다지는 결과로 이어졌다.2. 4. 사망
메이와 6년 (1769년) 1월 12일에 사망했다. 향년 20세였다. 요절했기 때문에, 단 한 번도 자신의 영지인 히토요시번에 가보지 못했다. 그의 뒤를 이어 양자인 사가라 나가히로가 번주가 되었다.3. 가계
(내용 없음)
3. 1. 친족 관계
3. 2. 양자
- 사가라 나가히로 - 이케다 무네마사의 차남
참조
[1]
문서
秋月種武は、日向国高鍋藩主秋月種政((1人目の)第9代藩主・相良晃長の曾祖父)の弟秋月種封に始まる秋月分家の旗本家の当主。種穀は後に種武の跡を継ぐ。
[2]
문서
原則では認められない、先代よりも年長者の家督相続を申請した動機は、近江国膳所藩主本多康伴相続の先例があることを相良家家臣が探知したためだったが、これは同族間によるものであ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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